Author: 구경선  

Tags: 소설   아동문학  

ISBN: 978-895913-895-1

Year: 2015

Text
                    
구작가(구경선) 두 살 때 열병을 앓은 뒤, 소리를 잃었다. 그렇지만 그녀에게는 그림이 있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그림으로 그려서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소리를 못 듣는 자기 대신 잘 들어주었으면 하고 ‘베니’라는 귀가 큰 토끼 캐릭터를 만들었다. ‘베니’ 그림으로 그녀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희망을 주기도 했지만 몇 년 전, 시력까지 잃게 되는 병에 걸리고 말았다. 소리가 없는 조용한 세상에서 살던 그녀는 지금 빛까지 사라지는 세상을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슬프지 않다고 한다. 그녀에게는 따뜻한 손이 남아 있고, 아직 말할 수 있는 입술, 좋은 향기를 맡 을 수 있는 코가 남아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그녀는 앞으로도 계속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라고 한다.





코코는 초인종 소리를 알려줘요 아, 누가 왔나 봐요. 초인종이 울리면 코코는 제 눈앞에 와서 야옹이라고 울어요. 알아채지 못하는 제게 알려주는 거죠.
사실, 전 소리를 듣지 못하거든요. 두 살 때 열병을 앓고서 귀가 아예 들리지 않게 되었어요. 옆에 비행기가 지나가는 큰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요.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엄마의 엄마로 태어나고 싶어요
귀가 들리지 않아 말을 할 수 없었던 저는 하고 싶은 말을 그림으로 그려서 사람들에게 보여주곤 했어요. 엄마는 말을 해보지 못한 제 혀가 굳을까 봐 설탕을 입 주변에 묻혀 빨아 먹는 연습을 하게 했어요. 계속 움직여야만 혀가 굳질 않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소리를 낼 수 있게 제 손을 엄마의 목에 갖다대고 그 울림을 느끼게 해주셨어요. 그러고선 다시 제 손을 제 목에 갖다 대고 비슷한 울림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그 연습을 쉬지 않았어요. 그냥 놀고 싶었던 저와 하나라도 꼭 가르쳐주고 싶었던 엄마. 아무도 모르는, 나와 엄마만이 아는 시간.
다른 사람은 상상할 수 없는, 지루하고 힘겨웠던 시간이 이제는 추억이 되었네요.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요 하지만, 자라면서 가는 길마다 높고 두꺼운 벽이 나타나고, 또 나타났어요. 그 벽을 하나씩, 매번 부딪쳐가며 허물었고, 그럴수록 마음에 반창고가 하나둘 늘어났어요.
결국 ‘한계’라는 큰 벽을 무너뜨릴 수 없었어요. 더 이상 무거운 벽을 이겨내기엔 제게 남아 있는 힘이 없었어요. 결국 가장 좋아했던 학교, 어렵게 합격했던 애니메이션 고등학교를 중퇴하게 되었어요. 그림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는데 말이죠. 현실에 대한 실망. 자신에 대한 실망. 여러 실망이 마구마구 뒤엉키면서 마음이 복잡했어요. 억지로 눈물을 삼키고 있는 내 모습이 참 씁쓸했어요.
그렇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새로운 일을 해보겠다고, 어설픈 이력서를 가지고 세상에 나가기로 마음을 먹었어요.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만 멀쩡할 뿐, 어떤 소리도 알아듣지 못하는 저를 아무도 원하지 않았어요. 모두에게 거절만 당했어요. 그때의 세상은 저에게 너무 거칠었고 차가운 잿빛이었어요.

그 이후로는 밖에 나가지도 않고, 멍하니 집에 있는 날이 대부분이었죠. 그러다가 우연히 시작하게 된 블로그. 이름을 정해야 하는데, 많은 예쁜 이름들 중에서 딱 떠오른 이름 하나. ‘구작가!’ ‘나도 작가가 되고 싶어. 당당하게 그림을 그리고,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멋진 사람이 되고 싶어. 내 그림으로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어. 그럴 수만 있다면 그림으로 희망을 주고 싶어.’ 제 모든 소망을 담은 이름, 구작가. 그 이름으로 모든 걸 시작하게 되었어요.

제게도 기회가 왔어요 엄마에게 매달 받는 용돈 5 만 원이 전 재산이던 시절. 그때 블로그를 통해 한 사람을 알게 되었어요. 그 사람이 ‘싸이월드 스킨작가’라는 직업을 알려주더라고요. 사람과 직접 만나지 않고 인터넷으로 일할 수 있어서 의사소통의 불편함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결심을 했어요. ‘그래, 이거야!’

저도 직업이 갖고 싶었거든요. 친구들이 꿈을 안고 대학에 들어갔을 때, 자랑스러운 학사모를 쓰고 졸업했을 때, 멋있게 유학을 떠날 때, 회사에 취직해서 여행도 하고, 부모님 선물도 사드리고, 갖고 싶은 걸 스스로 살 수 있는 어른이 되었을 때, 저만 계속 제자리였거든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고, 아무 일도 할 수 없었거든요. 그래서 저도 ‘이런 사람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직업이 갖고 싶었어요. 망설일 필요가 없었지요. 유일하게 제가 다른 사람과 동일하게 일할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요.
씩씩하게 도전을 시작했지만 작가가 되는 건 쉽지 않았어요.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아주 많았으니까요. 그래도 그림 그리는 걸 쉬지 않았어요. 꼬박 9 개월이 걸려 싸이월드 스킨작가가 되었어요. 그 순간 정말 아무도 부럽지 않을 정도로, 누구도 부럽지 않을 정도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드디어 나도 일이 있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런 기분이 들었어요. 그렇지만, 1 년 내내 스킨작가로 일하는 동안 보수는 정말 적었어요. 제가 상상한 모습과 많이 달랐죠. 꿈이 멀어져가는 것 같았고, 점점 지쳐갔어요.
‘지친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그러던 어느 날, 마감을 한 시간 앞두고 제 마음을 대신한 그림을 그려서 보냈어요. 그림 제목도 <다 귀찮아>로 해버렸어요. ✽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 같았어요. 내 눈앞에 보이는 숫자. 통장에 찍힌 숫자.
믿기지 않았고, 믿을 수도 없었어요. 여러 번 볼을 꼬집어보기도 했어요. 진짜일까…. 태어나서 처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제 그림을 인정해주었어요. 그 후로도 끊임없이 제 그림이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지금 다시 생각해도 가슴이 벅차고,
감사해요. 그때 제게 희망과 용기가 생겼거든요. 그때 받은 사랑을 아직도 마음에 품고 있어요. 늘 잿빛 같았던 세상이 서서히 분홍빛이 되었어요. 항상 친구들 자식 자랑을 듣고 살아온 엄마, 엄마는 남의 자식과 비교하지 않고 절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셨지요. 그런 엄마에게 용돈도 드릴 수 있게 되었어요. 교회에서 헌금도 할 수 있고, 고마운 친구들에게 밥도 살 수 있고, 타인에게 선물도 해줄 수 있고,
갖고 싶은 것도 사고, 먹고 싶은 것도 먹고, 보고 싶은 것도 보고, 이 모든 것이 무척 감사하게 느껴져서, 제가 직업이 갖고 싶었던 저처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무언가 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제 그림으로 조금씩 나눔을 하게 되었어요.
세상이 자꾸만 어두워져요 기분 좋은 봄날… 그런데 갑작스러운 싸이월드의 하락.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뿔뿔이 떠났어요. 항상 진동이 울리던 핸드폰이 점점 조용해졌어요. 분홍빛이었던 세상이 다시 잿빛으로 변하기 시작했어요.
텅텅 빈 공간에 저만 덩그러니 남겨진 듯했어요. 아무도 없고, 아무리 불러도 반응이 없는. ‘나는 이제 필요 없어진 걸까?’ 내 마음을 알아주던 그림도 낯설어졌어요. 그림 그리는 일에도 소원해졌어요. 가까운 사람도 만나기 거북해졌어요. ‘요즘 뭐해?’라는 질문을 듣고 싶지 않았어요. 무척
바쁘다가 한가해진 내 모습이 창피했어요. 생각보다 너무 길었던 공백…. 날카로운 가시밭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 같았어요. 혼자만 헤매는 것 같았어요. 아무리 걸어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어요. 포기하지 않고 계속 걷다보면 푸른
초원이 펼쳐질 거라고 믿었지만, 아무리 가도 그 초원은 보이지 않았어요. 몸도 마음도 너무 괴로워 교회를 찾아갔어요. 긴 시간 동안 혼자서 실컷 펑펑 울며 기도를 했더니, 딱딱하게 굳었던 마음이 풀리더라고요. ‘울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 난 아직 어린데…
이렇게 포기할 수 없잖아.’ 살아 숨 쉬고 있는 한 절망만 할 수는 없어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고, 예전의 간절했던 마음으로 새롭게 다시 해보자고,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방법을 찾기 위해 동사무소를 찾아갔어요. 장애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제도가 있다고 들었거든요. 그곳에서 저에게 필요한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나라에서 저를 위해 마련한 최소한의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동사무소에서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 몰라 민망하게 서 있는데, 친절하게 제게 다가와준 뇌성마비 여직원. 전 그분의 삐뚤빼뚤한 입모양을 알아볼 수 없었어요. 입모양이 정확해야 그 뜻을 알 수 있거든요. 그녀는 저를 위해 또박또박 한 글자씩 힘껏 힘을 주어가며 천천히 글씨를 써나갔어요.


그녀는 저와 같은 장애는 아니지만 장애를 지닌 사람으로서 제 장애를, 그 아픔을 온전히 이해하는 듯했어요. 아니, 이해가 아니라 그냥 아는 것 같았어요. 저를 도와주기 위해 진심을 가득 담아 설명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열정이 조금씩 되돌아오기 시작했어요. 오래 쓰지 않아 먼지가 잔뜩 쌓였던 전구를 환하게 밝힌 것처럼. ‘나는 왜 재미없게 살고 있었을까?’ ‘왜 남들이 사는 대로 살려고 했을까?’ ‘나는 왜 절망만 했던 걸까!’ ‘남의 조건과 환경을 부러워하다보니 부러움이 비교가 되어버리고, 자존감이 낮아지고, 행복지수가 낮아진 게 아닐까. 내가 가진 것이 남보다 없다고 생각한 건 단순한 비교가 아니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얼마든지 많은데 스스로 포기한 것은 아닐까.
사실 나만 그런 게 아니고, 다른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 사람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어졌어요. 내 자신이 행복해지는 일을 찾고 싶었어요.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일은 무엇일까? 누군가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것? 그림을 그리는 것? 그렇다면 직접 내 발로 찾아가서 꿈이 없는 아이들을 만나 같이 그림을 그리고, 한 나라, 한 명의 꿈을 하나씩 모아보자. 그렇게 해서 책을 만들어야지.’ 그 마음을 담아서 <내가 되고 싶은 나>라는 미술 선교 프로그램을 만들었어요. 30 개 나라에 가는 걸
목표로 삼고, 한 나라, 한 나라씩 찾아가기 시작했어요.

이제 소리도 볼 수 없게 되었어요 미술 선교 프로그램의 네 번째 나라였던 필리핀. 그곳에 가기 위한 준비를 하던 도중 한 친구에게 조심스러운 권유를 받았어요. 그즈음 야맹증도 점점 심해져서 밤에 잘 보이지도 않고, 이유없이 자주 부딪히고 다쳤거든요. 친구가 옆에서 손짓을 해도 전혀 보지 못했어요. “경선아, 병원에 가 봐… 늦기 전에.” “병원? 무슨 병원?” “안과에, 얼른 가 봐. 느낌이 안 좋아.” “왜?” “…”
친구의 걱정스러운 권유에 어리둥절했지만, 검사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어요. 병원에 가기 전, 두렵고 궁금한 마음으로 검색을 해보았어요. 녹내장의 증상이 제 증상과 무척 비슷했어요. 걱정을 안고, 엄마와 함께 병원을 찾아갔죠. 검사 결과는 녹내장이 아니래요. 안심이 되었어요.
그런데 엄마의 표정이 무척 어두워지기 시작했어요. “엄마, 왜 그래? 녹내장이 아니라잖아. 다행이야.” “…” “엄마?” “망막… 뭐였더라… 망막색소변성증?… 이라는데.” 엄마의 떨리는 입술을 본 순간,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른 개그맨 이동우의 다큐멘터리. 오랫동안 볼 수 없었던 그의 아픔이 담긴 방송. 그 방송이 머릿속을 스쳐가는 거예요. ‘설마….’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해보았는데, 이동우… 그분의 병명과 나의 병명이 같더라고요.

왜 내 것만 자꾸 뺏어가는 걸까요? ‘괜찮아, 뜻이 있겠지.’ 처음에는 스스로 다독이려고 주문을 걸어봤어요. 그렇지만…. 왜? 어째서? 왜 나야? 대체 왜? 아무리 생각해봐도 납득이 되질 않았어요. 청각장애 하나로도 이제까지 충분히 버겁게 살았는데…. ‘소리가 없어도 예쁜 옷을 사 입는 즐거움, 독특한 소품을 모으는 재미, 아름다운 풍경을 보는 소소한
행복, 사랑하는 사람들과 주고받는 카카오톡 메시지. 겨우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이제야 조금 알게 됐는데 많은 행복들을 왜, 모두 앗아가는 거야? 내게 절대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소중한 눈을 왜 가져가려고 하는 거야? 왜 내 것만 자꾸 뺏어가는 거야?’ 잿빛으로 느껴졌던 세상이, 이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으로 느껴졌어요.

‘그럼, 앞으로… 그림을 그릴 수 없는 걸까?’ 유일하게 잘 할 수 있는 그림마저 못 그리게 된다니, 감당할 수 없는 분노만 마음속에 커져갔어요.
그림 한 장에 희망이 있었어요 그렇지만 그때 필리핀 선교 프로그램을 앞두고 있었고, 이제 와서 취소할 수 없었기에 설명할 수 없는 분노로 가득한, 새까맣게 탄 마음을 안고 어쩔 수 없이 떠났어요. 그런 마음으로 아이들에게 무슨 희망을 줄 수 있겠어요…. 그때는 타인을 돌볼 여유가 없었죠. 그런데 그곳에서 한 소년을 만났어요. 태풍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은 한 남자아이. “저는 사진작가가 되어서 세계를 돌아다니고 싶어요.” 수줍게 웃으며 소년이 제게 말했어요.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도 저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어요. 그냥 그림 한 장을 소년에게 그려줬어요.


그런데 그 아이는 그 그림이 그저 너무 좋았는지, 밥도 먹지 않고 한참을 보더니, 소중하게 자신의 품에 감싸 안았어요. 그때,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를 느꼈어요. 제 마음에 가득했던 빨간 덩어리가 서서히 녹기 시작했어요. 모든 것을 잃은 소년도 저렇게 꿈을 꾸며 좋아하는데 제게는 그래도 많은 것이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아이에게 희망을 줄 수 있구나…. 내 작은 그림이…. 엄마… 미안해요
소년 덕분에 조금은 투명해지고 깨끗해진 마음을 안고 한국에 도착했어요. 그렇지만 집에 돌아와 혼자 소파에 앉아 있는 엄마를 물끄러미 보니, 갑자기 마음이 아려왔어요.

“엄마… 미안해….” 이제 어린아이도 아닌 다 큰 딸. 다 큰 딸이 엄마를 챙겨드려야 하는데 귀는 아예 들리지 않고, 눈은 언젠가 안 보이게 될 거고…. 암흑 속에 살면서 어쩌면 저는 엄마에게 평생 보살핌을 받아야 할지도 모르죠. 너무너무 미안하고 속상했어요. 그냥,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냈어요. 그렇게 그날은 눈물로 밤을 지새웠어요. 계속 기도를 했어요.

울고 싶지 않았지만… 눈물을 그칠 수가 없었어요.
빛이 아직 남아 있잖아요 다음 날, 퉁퉁 부은 마음으로 일어났는데, 창밖을 보니 첫눈이 내리고 있었어요! 첫눈. 생각해보니 한 번도 첫눈을 제대로 본 적이 없더라고요. 이제 와서 처음, 첫눈을 보니 그 눈이 너무나 아름답다는 걸 그제야 알았어요. 그리고 아직 첫눈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감사했어요.
왜냐하면 지금까지 무엇을 본다는 건 그냥 당연한 일이었으니까요.

요.

눈이 보일 때 할 수 있는 걸, 그리고 하고 싶은 걸 모두 해보자.






기적을 선물받았어요 작업실 갖기 앞으로 남은 시간에 꼭 해야 하는 일, 첫 버킷리스트를 무엇으로 할까 고민이 시작되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버킷리스트. 청춘의 로망 ‘독립’. 작가의 로망 ‘작업실’. ‘하나님, 작업실이 너무 갖고 싶어요.
도와주세요.’ 간절한 마음을, 나지막하게 말해봤어요. 그런데 그때 생각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났어요. 출판사와 책 계약을 해서 계약금이 생기고, 친한 친구가 여행 갈 돈을 저에게 준 덕분에 작업실 보증금이 전부 만들어졌어요. 그리고 제 그림으로 엽서를 만들어서 그 수익으로 월세 6 개월분도 미리 선납하고, 작업실 계약을 무사히 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렇게 계약하게 된 오래된 오피스텔. 다른 건 몰라도 화장실 타일은 바꾸고 싶었어요. 그래서 예쁜 타일을 가진 공사 업체를 알아봤죠. “어디에 시공하실 건가요?” “제 작업실이에요!” 작업실…. 내 입으로 ‘작업실’이라고 말해보고 싶었는데, 그쪽에서 묻지도 않은 작업실에 대한 에피소드를 제가 먼저 얘기했어요. 사실 자랑하고 싶었어요. 누군가에게 나도 작업실이 생겼다고, 너무 자랑하고 싶었거든요.



“작가님, 작업실을 어떻게 꾸미고 싶으세요? 다 말해보세요.” 갑작스럽고 의아했지만, 그동안 꿈에 그리던 모습들을 하나하나 말씀드렸어요. 그러자 대표님이 모두 지원해주겠다고 하시는 거예요! “아… 정말이세요?” “네, 저희도 작가님에게 선물을 주고 싶어요.”
마법 같았어요. 허름한 신데렐라를 아름다운 공주로 바꿔준 요정 할머니처럼요. 그런데 이사에는 생각보다 많은 비용이 필요하더라고요. 비용을 줄이려고 SNS 에 필요한 물품을 적어서 올려봤어요. 가스레인지, 전자레인지, 냉장고, 청소기, 밥솥, 그릇…. 그러자 카톡이 계속 울렸어요. 으네언니의 청소기, 마시멜로의 압력밥솥, 막내이모의 냉장고와 작은 텔레비전, 김형운 목사님의 전자레인지, 민진이의 빨래건조대,
혜밀의 그릇들과 커튼, 한 사람 한 사람이 보내주는 선물, 물려주는 보물들. 그렇게 필요한 부분이 전부 채워졌어요.

이건 그냥 작업실이 아니에요. 저에게는… ‘기적의 작업실’이에요! ✽ 작업실 공사에 도움을 주신 타일 업체 <한류문화인진흥재단>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키엔호>, 월세 지원에 도움을 주신
오늘,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엄마에게 미역국 끓여드리기 매해 생일마다 엄마가 손수 끓여주는 미역국을 꼬박 먹고 자랐는데, 정작 저는 엄마에게 미역국을 끓여드린 적이 한 번도 없었더라고요. 부끄러웠어요. 그래서, 태어나 처음으로 엄마에게 미역국을 끓여드리기로 결심했어요. ‘미역국은 어떻게 끓이지?’ 친구들에게 카톡으로 미역국 끓이는 법을 물어봤어요. 여러 번 설명을 듣고, 장을 봤어요.

태어나 처음으로 끓여본 미역국. 초코 케이크도 사다놓고 엄마를 기다리는데, 그 시간이 너무나 더디게 느껴졌어요. 1 분이 한 시간 같고, 한 시간이 하루 같았어요. “엄마! 얼른 앉아봐! 얼른!” 엄마를 신나게 식탁으로 모셨어요. 엄마는 무척 놀란 것 같았어요. “정말 그럴싸한데?
우리 딸 이제 시집가도 되겠네!” 엄마는 계속 웃었어요. 그런데 기도하는 엄마의 눈에 눈물이… 흐르는 거예요. 주르륵



“엄마, 뭐라고 기도했어?” “흠, 우리 딸이 만들 줄도 모르는 미역국을 처음으로 끓여줬다고. 앞으로도 미역국 끓일 수 있게 해달라고, 눈을 지켜달라고 기도를 했어.”
천국이 있다면 이런 느낌이겠죠 ‘우유니 소금사막’에 가서 누워보기 ‘세상에서 가장 큰 거울’이라고 불리는 볼리비아의 우유니 소금사막. 1 월에서 3 월까지 우기로 비가 고여 20~30 센티미터 정도의 얕은 호수가 만들어지면서 하늘과 땅의 경계가 사라지고 멋진 풍경이 나온대요. 건물도 없고, 나무도 없고, 오직 하늘과 땅만 있는, 복잡하지도 않고 고요한 그곳. 바람도 기분 좋게 솔솔 불어오면 정말 완벽할 거예요. 그곳에 누울 상상을 하니까, 하늘 위에 눕는, 그런 느낌일 것 같아요.
아마도 천국 같을 거예요. 그래서 우유니 소금사막에 꼭, 가서 누워보고 싶어요.

지금까지의 슬픈 기억은 전부 이곳에서 사라질 거예요. 그 모습을 간직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김연아 선수 만나기 대한민국 사람들이라면 모두 환호하고 좋아하는 멋진 선수, 김연아. 세상 사람들이 모두 모인 화려한 경기장에서 늘 우아한 그녀의 모습만 보았죠. 어느 날, 눈부시게 빛나는 빙판 뒤에 김연아 선수의 외로운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고 마음이 짠해졌어요. 마치 자신과의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 같았거든요. 아무도 모를 그녀만의 고독. 장애와 싸우고 있던 나, 그녀에게 마음이 자꾸 갔어요. 그렇게 더욱 팬이 되어버렸죠.



시간이 흘러 어느덧 마지막 무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게 된 김연아 선수. 소치올림픽의 마지막 무대를 텔레비전으로 보는데, 투명한 빙판을 가득 채우는 그녀의 연기를 보면서 눈물이 어느새 흘러나왔고, 힘찬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었어요. 존경스러운 그녀의 무대를 역사적인 마지막 무대를 ‘아직 볼 수 있어서’ 보았다는 것 자체가 무척 감사했으니까요.

벌써 안 보였다면 너무… 아쉬웠을 거예요. 그 순간을 생생하게 보고, 느낄 수 있는 게, 그리고 제 맘 속에 간직할 수 있는 게 감사했던지…. 얼마나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포옹을 했어요 돌고래와 헤엄치기 <더 코브>라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돌고래의 아픔을 알고 충격을 받았어요. 너무나 안타까워 그 슬픔이 가슴 한 구석에 계속 남아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에도 돌고래와 헤엄칠 수 있는 곳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돌고래를 만나보고 싶어져 바로 달려갔어요. 돌고래는 초음파가 아주 강해서 사람의 몸속까지 느낄 수 있다고 해요. 어떤 여자의 몸속에 암이 있다는 걸 돌고래가 처음 발견했대요. 그래서 돌고래가 속이 새까만 나에게 다가와주지 않을까 봐 조금 걱정이 됐어요.
물속에서 헤엄칠 줄 모르는 나, 깊은 물속에 들어가니 덜컥 겁이 났어요. 구명조끼를 입었지만 몸이 제 마음대로 가누어지지 않는 게 무서웠어요.
“어어!” 짧은 외마디 비명에 갑자기 한 마리의 돌고래가 다가와서 기울어지는 제 몸을 받쳐주는 거예요! 그 후로 제가 떠날 때까지 그 돌고래가 주위를 맴돌며 계속 저를 챙겨줬어요.
그 순간, 반짝반짝 빛나는 별들이 떨어지는 밤바다에서, 돌고래에게 몸을 맡기는 기분이 들었어요. 그리고 돌고래가 저에게 말하는 것 같았어요. 소리도, 빛도 없어도 온전히 모든 감각으로 느껴보라고…. 아직 포기하지 말라고….
지금도 늦지 않았어요 헤어진 친구 찾기 어릴 때, 아주 친한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와 크게 다투고 절교를 하게 되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별거 아니지만요. 대화로 푸는 법을 몰랐던 어릴 때여서 허무하게 서로 멀어져만 갔어요. 그렇게 10 년이 훌쩍 흘러갔네요. 하지만 그 친구를 다시 꼭 만나고 싶었어요. 아직 건강할 때, 다시 만나고 싶었거든요.


새로운 병에 대해 알게 되고, 여러 가지 일들이 겹쳐 잠시 소홀했던 블로그와 SNS. 고민 끝에 사람들에게 제 병에 대해 고백을 하려고 덤덤하게 글을 올렸어요. 그중 한 친구가 제 소식을 보고 놀라서 퍼간 글을 그 친구가 우연히 보게 되었고, 다음 날 새벽에 장문의 카톡이 와 있었어요. 아주 조심스럽게 용기를 내서 다가온 친구의 마음이 느껴지는 무거운 카톡. 그 마음에 화답하려고 답장을 하려는데, 손이 너무 떨렸어요. 계속 썼다 지우고, 또 썼다 지우다 답장을 보냈어요.



며칠 후, 친구가 멀리서 저에게 달려와줬어요.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점점 마음에 남은 응어리를 모두 풀어낼 수 있었어요. “우리 10 대는 같이 보냈는데 20 대를 같이 보내지 못한 게 너무 아쉽다….” 아쉽지만 이제부터라도 다시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게 기뻤어요. 만나서 기뻤다고, 서로 포옹을 하고 헤어졌어요.
‘너의 뒷모습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어.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저도 여자랍니다 소개팅 해보기 누구나 한 번은 해봤을 소개팅. 특별히 소개팅을 꺼린 건 아닌데, 한 번도 소개팅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더 나이를 먹기 전에 소개팅을, 한 번만 해보고 싶어졌어요.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는 남자와 단둘이 만나는 자리가 얼마나 어색하고 떨릴까. 저도 느껴보고 싶었어요. 결과는 기대하지 않고, 그 어색한 떨림을 한 번 느껴보고 싶어요.



소개팅을 한 사람들은 마음의 바구니에 하트가 다 들어 있을 것 같은 상상을 하게 되어요. 그런데 제 마음의 바구니에는 하트가 하나도 없어요. 저도 이제 하트를 하나만 넣고 싶어요. 딱 하나면 돼요.
낯선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어요 플리마켓 참여하기 낯선 사람들을 많이 마주하게 될 플리마켓. 제 그림으로 만든 엽서, 정성과 노력이 가득한 제 그림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안 팔릴까 봐 두근거리는 마음. 그렇지만 잘 팔리면 기쁜 마음.
소소하면서도 특별해서 재밌을 것 같은 경험을 놓치고 싶지 않아요. 어른이라면 말이죠 운전면허증 따기
사실, 운전이 하고 싶은 게 아니에요. 들리지도 않고 잘 보이지도 않는데 운전은 저에게 너무 위험하죠. 하지만 어른이라면, 누구나 운전면허증이 있잖아요. 운전면허증은 이제 성인이라는 상징이 아닐까요. 정확히 말하자면 전 ‘운전면허증’이 갖고 싶은 거예요. 운전은 못 해도 그 면허증이 있다는 사실이 왠지 뿌듯할 것 같아요. 운전면허증, 저도 갖고 싶어요. “나도 운전면허증이 있어!” 라고 친구들에게 우쭐대고 싶거든요. 남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겠지만 제게는 꼭 따고 싶은 면허증이랍니다. 지금 당장 필기시험 공부를 해야겠어요.

언제까지나 예쁘게 보이고 싶어요 살빼기 지금은 눈이 보이니까, 제 몸매의 단점을 잘 알아요. 그래서 스스로 단점을 커버하는 옷을 고를 수 있어요. 그런데 눈이 안 보이면, 다른 사람이 옷을 고르고 입혀줄 텐데 그땐 제 몸매의 단점을 세심하게 가려줄 여유가 없겠죠.
단점이 드러나서 덜 예뻐 보이기보다 아무거나 입혀도 보기 좋게, 예쁘게 몸매를 만들고 싶어요. 그래서 살을 뺄 거예요. 아주, 열심히…
열심히 빼서 입혀주는 사람이 고민 안 해도 되게. 저는 제 모습을 볼 수 없어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예쁘게 보이고 싶어요.

사소하지만 용기가 필요해요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연락처 묻기 제가 좋아하는 이름은 ‘르우벤’이에요. 제 상상으로 만든 이름이지요. ‘르우벤’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면 연상되는 이미지가 있거든요. 머리는 아주 검고, 곱슬곱슬하고, 가슴까지 내려와요. 눈썹은 진하며 눈은 깊어 보이고, 그 눈은 마치 비밀이 많은 듯한, 그만의 이야기가 아주 가득한 눈. 어딘가 슬퍼 보이기도 하고, 외로워 보이기도 하고, 우수에 젖은 그런 눈. 그런 눈이 매력적인 ‘르우벤’. 그런 이름이 어울리는 남자가 제 이상형이에요.



하지만 상상 속의 그런 남자를 좀처럼 볼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2 년 전 네팔에서 ‘르우벤’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남자를 보았어요! 달리고 있는 택시 안이었는데, 도중에 차를 세우고 남자에게 달려가서 연락처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어서 그대로 스쳐가고 말았어요. 영화처럼 3 초가 3 분처럼 느껴질 정도였다니까요. 2 년이 지난 지금도, 네팔의 그 남자가 잊히지 않는 걸 보니 그때 연락처를 물어봤어야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앞으로 ‘르우벤’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남자를 보면 꼭 연락처를 물어보리라 결심했어요. 어쩌면 제게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니까요. 제 눈에 직접 담고 싶어요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가기 눈이 안 보이기 전에 어렸을 때부터 보아왔던 명화들을 파리의 가장 큰 미술관, 오르세 미술관에 가서 직접 두 눈으로 생생하게
보고 느끼고 싶어요. 책으로 봤고, 인터넷으로 봤던 그림들이 눈앞에 있다면 얼마나 근사할까요. 각국의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멋진 그림들을 볼 상상을 하니까 가슴이 두근거리네요. 다른 사람들은 언제라도 파리에 가서 볼 수 있지만, 전 그 그림들을 볼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전혀 알 수 없어요. 제게 남아 있는 하루하루가 너무 소중하고 아깝거든요. 아직 빛이 남아 있을 때, 제 눈에 그 그림들을 꼭 담고 싶어요. 제게도 그런 날이 꼭 오겠죠?
모든 빛이 사라지기 전에 꼭 한 번 보고 싶어요.






3 일 동안의 소원이 있어요 헬렌 켈러의 소원 대신 들어주기 어릴 때부터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던 헬렌 켈러. 그녀는 3 일만이라도 눈을 뜨게 되어서 세상을 보는 게 소원이었다고 해요. 그녀의 소원을 아직 눈이 보이는 제가 대신 들어주고 싶었어요.
★ 첫째 날 ∷ 나의 설리번 선생님 찾아뵙기 ‘나의 설리번 선생님은 누굴까.’ 고민하기도 전에 번뜩 떠오른 한 분. 애니메이션 고등학교에 다닐 때, 너무나 거칠었던 나를 유일하게 칭찬하셨던 선생님. 류광우 국어 선생님. 그땐 국어선생님이었는데, 지금은 자랑스러운 교장선생님이세요. 오랜만에 선생님께 연락을 드렸어요. 그리고 제 눈에 대해 간단하게 말씀드리고, 찾아갔어요. 선생님은 저를 보시자마자 반겨주셨지만, 예전과 다르게 무거운 반가움이었어요.
“오랜만이구나.” 선생님은 말씀하지는 않으셨지만, 제 눈에 대해 걱정하고 계신 게 느껴졌어요.

“선생님께 가장 감사하는 건, 모든 사람들이 절 못마땅하게 바라볼 때, 제 안의 장점을 발견해주시고, 제 개성을 진심으로 존중해주신 점이에요. 학교를 그만두고, 험한 세상으로 나가면서 제 개성을 버리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습으로 바꿔 살려고 노력할 때, 제게 말씀하셨죠. ‘너의 매력이 사라지는구나’라고요. 그때 선생님께서 제 개성을 마음 깊이 예쁘게 봐주셨다는 걸 크게 느꼈어요. 그래서 조금씩 나답게 돌아올 수 있었어요. 정말, 여러 가지로 선생님께 감사한 게 많아요. 꼭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 왔어요.” “그랬구나, 내가 해준 것도 없는데 그렇게 생각해줬다니 고맙다.” 진지하게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눴어요. 집에 도착하니 카톡이 와 있었어요. “경선아, 눈이 예전보다 맑고 예쁘더라. 그 눈에 네가 눈물을 담았다면 나는 울었을 거다.
그리고… 너에게 배웠다. 어떤 만남이건 소중히 해야 한다는 것을.”

★ 둘째 날 ∷ 아침, 출근하는 사람들 보기 지하철역으로 갔어요. 직장인들이 아침에 가장 많이 이용하는 지하철. 가는 내내 사람들을 보았어요. 거의 다 빠르게 걷거나, 혹은 뛰어가는 모습이기도 했어요. 느릿하게 걷는 사람은 나뿐이었어요. 역에 도착해서 가만히 앉아 있었어요. 사람들은 모두 달랐어요, 신기하게도. 어떤 사람은 인상을 찌푸리고 핸드폰을 보고 있었고, 머리도 안 말린 채 연거푸 하품만 하는 사람, 허겁지겁 샌드위치를 먹는 사람, 멍하게 정면을 바라보는 사람, 서류를 열심히 보고 또 보는 사람도 있었어요. 지하철역에는 직장인만 있는 건 아니었어요. 두툼한 배낭을 메고, 무거운 책을 들고 있는 학생, 설레는 모습으로 캐리어를 끌고 가는 여행객, 등산객 그리고 큰 보따리를 들고 가는 할머니도 있었어요. 제각각 묘하게 걸음 속도가 달랐어요. 마치, 똑같은 시나리오는 없다는 걸 말하는 것 같았어요. 누구나 인생은 제각각이니까요.
그들의 모습을 보며 각각 삶의 색깔이 어땠을 지 궁금해졌어요. 같은 곳에서 함께 숨을 쉬는 이 시간에 ‘살아 있음’을 느꼈어요. ‘나, 살아 있구나.’ ★ 둘째 날 ∷ 점심, 혼자서 영화 보기
아직 완전히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두우면 잘 보이지 않아요. 그래서 가까운 우리 동네 영화관에서 사람이 없는 시간대를 골랐어요. <라스트베가스> 영화표를 샀어요. 좌석 번호가 의미가 없을 정도로 텅텅 빈 영화관. 영화는 아주 유쾌했어요. 웃음이 터지고 또 터졌죠. 웃으면서 무의식적으로 옆을 돌아보니, 아무도 없네요. 영화를 다 보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나가면서 “이 영화는 정말 보길 잘했어!” 이렇게 말하고 싶은데, 아무도 없네요. 왠지, 기분이 좋아진 게 아닌 듯 어딘가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하게 느껴졌어요.
★ 둘째 날
∷ 저녁, 시내의 반짝거리는 네온사인들 보기 다양하고 정신없는 네온사인들로 꽉 찬 거리. 각각 색깔을 뿜어내며 반짝거리고 있고 불빛 아래 신난 표정으로 지나가는 사람들. 그 빛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슬퍼졌어요. 헬렌 켈러였다면… 어땠을까? 그녀가 3 일만 볼 수 있다면 이제 내일은 눈이 보이는 마지막 날인데…. 헬렌 켈러는 처음부터 안 보였으니까, 기분 좋은 소풍을 다녀온 느낌이려나. 아니면, 다시 어두운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려나. 잘 모르겠네요. ‘나도… 눈이 보이는 마지막 날을 맞이하게 된다면, 어떤 마음일까.’ 생각도 하기 싫고, 쓴맛이 느껴지는 밤이었어요.

★ 셋째 날 ∷ 해가 뜨는 순간 보기 헬렌 켈러의 마지막 소원. 쌀쌀한 새벽에 일어나 엄마와 함께 산에 올라갔어요. 깜깜한 하늘, 그리고 아직 꺼지지 않은 불빛들. 이른 새벽부터 움직이는 몇 대의 자동차. 작은 불빛들이 별들처럼 반짝거리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있으니 어느새 해가 뜨기 시작했어요. 하늘이 점점 주홍빛으로 물들여지면서 눈뜨고 똑바로 볼 수 없을 만큼 아주 눈부신, 해가 점점 얼굴을 보여줬어요. 아침도 아니고, 밤도 아니고 하늘은 이제 밝은 하늘색이 되었는데, 땅은 아직 껌껌했어요. 평소라면 볼 생각도 못했던 신기한 풍경을 보았어요. 이제껏 꿀꿀했던 날들이 싹 잊혀졌어요. 새롭게, 씩씩하게 시작해야 할 것 같아요. 아주 기분이 좋아졌거든요. 다행이에요. 첫째 날 설리번 선생님을 만나고 행복에 젖었다가 둘째 날 왠지 모르게 슬퍼졌다가,
셋째 날에 아주 멋진 풍경을 보고 이 모든 걸 마음에 고이 간직하고 돌아갈 것 같아서 참 다행이에요. 오늘,
눈부신 아침을 볼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눈이 보일 때 제 짝을 꼭 만나고 싶어요 셀프 웨딩 사진 촬영하기 “내 인생에 ‘결혼’이라는 단어는 절대 없을 거야.” 병명을 듣고 포기한 단어, 결혼.

몇 개월 후, 화장에 관심을 가지면서 립스틱도 바르고, 피부에도 신경을 쓰면서 점점 예뻐진 내 모습을 보고 조금은, 자신이 생겼어요. ‘어딘가에 내 짝도 있을지 몰라! 정말 있을지도 몰라.’

그래서 소박한 레이스 원피스를 입고, 작은 부케를 들고 예쁘게 사진을 찍어서, 나도 이렇게 예쁘다고 보여주고 싶어졌어요. 어딘가에 있을 내 소중한 짝에게요. “날 혼자 두지 말아요.” 우리 가족을 지켜주세요 가족여행 가기
어릴 때 여름마다 온 가족이 여행을 자주 떠났는데, 점점 뜸해지다 없어졌어요. 오랜만에 가족여행이 생각났어요. 추억을 만들 수 있을 때 만들고 싶었어요. 그게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가족여행,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일일지 몰라도 누군가에게는 너무 특별한 일이기도 해요. 우린, 때로 자신 곁의 가장 소중한 가족을 너무 쉽게 잊고 사니까요. 다음에 가면 된다고 미루는 생각, 저도 지금까지 그렇게 살았던 것 같아요. 그렇게 1 박 2 일, 가까운 강원도로 엄마와 동생과 여행을 갔어요. 시장에서 이것저것 구경을 하고, 펜션에서 고기도 구워 먹고, 마지막으로 낙산사에 갔어요.
올라가면서 <꿈이 이루어지는 길>이라는 팻말을 보았어요. 그 길을 따라 걷는 엄마와 동생의 뒷모습을 보니 코끝이 찡해왔어요. 그냥,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기도를 했어요.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요 베니를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팬미팅하기 토끼 베니, 제 그림을 좋아해주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고 싶어요. 먼 훗날 ‘이 사람이 네 그림, 베니를 좋아한단다’라고 이야기를 들어도 그 얼굴을 볼 수 없으니, 마음에 와닿지 않을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전에 고마운 얼굴들을 보고 싶어요. 얼굴을 직접 보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고마운 제 마음을 간절히 전하고 싶어요.

서로의 온기를 나누고 싶어요 명동에서 프리허그하기 한 해가 다 가고 연말이면 열심히 한 해를 보냈다고 뿌듯한 사람도 있겠지만, ‘한 해가 가도록 뭐했나.’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다니.’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겠죠. 왠지 허망하고 우울한 사람이 더 많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자주 그랬으니까요. ‘마음이 아픈 사람, 고민이 많은 사람. 저에게 오세요. 제가 안아줄게요.’ 이렇게 팻말에 큼지막하게 써서, 명동 한복판에서…. 우두커니 서서 사람들을 기다리고 싶어요. 그 사람들을 꼭 안아주고 싶어요. 내가
용기를 낸 것처럼, 용기 내서 다가와주는 사람들을 안아주고 싶어요. 서로가 서로를 안아주는 그 온기로 아주 작더라도 위로와 희망을 전하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기쁨을 선물하고 싶어요 타인을 위한 의미 있는 일하기
제게는 마음이 아픈 한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는, 한 남자와의 이별 때문에 깊은 상처가 생겼어요. 그 상처를 안고 미국에 갔다가 운명의 남자를 만났어요. 그 남자는 친구의 상처를 보듬어주며 치유해줬어요. 둘은 4 년 연애 끝에 결혼을 하게 되었고, 친구는 제 그림으로 청첩장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어요. 친구의 새로운 행복이 무척 기뻐서 꼭 청첩장을 만들어주겠다고 약속을 했어요.


누군가를 돕는 일에는 기부도 있고 봉사도 있지만, 기부도 아니고 봉사도 아닌 순전히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제가 가진 재능으로요. 타인을 위한 의미 있는 일, 그 친구를 위해 사용하기로 했어요. 소박하지만 큰 기쁨을 친구에게 선물하고 싶거든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 시간을 느끼고 싶어요 추억여행 떠나기
∷ 봉숭아 물들이기 어릴 때, 여름이 올 때마다 항상 물들였던 봉숭아. 손가락 하나하나에 봉숭아 빻은 걸 얹고 비닐로 꽁꽁 싸매 실로 꽉 묶었던, 밤새 손가락이 가려워 빼버린 기억. 봉숭아 꽃을 구할 수 없을까?
이제는 손톱을 장식하는 네일숍이 많아졌어요. 손가락까지 물들이는 봉숭아가 갑자기 그리워졌어요. 그래서 많은 꽃집을 가봤지만, 어디에서도 봉숭아를 팔지 않는 거예요. 세상이 참 많이 변했다는 걸 느꼈죠. 어린 시절 물들인 은은한 봉숭아를 지금 아니면 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추억여행을 포기하려고 할 때 엄마가 말해줬어요. “우리 교회 권사님이 봉숭아를 주신대.” “어머, 진짜?” 손녀딸에게 물들여주려고 봉숭아 나무를 심고, 올해 정성껏 빻아놨지만, 손녀딸이 오지 않게 되어서 무용지물이 되었다고, 제가 찾고 있다니까 흔쾌히 주시겠다는 거였어요. 정말 기뻤어요.

수화선생님이 오셔서, 도와달라고 부탁했어요. 빻아놓은 봉숭아를 조그맣게 뭉쳐 손톱 하나하나에 올리는 모습을 보니 설레고 신이 났어요.

그날 밤, 실로 꽁꽁 맨 열 손가락을 조심스레 이불 위에 놓고 시큼한 냄새를 맡으며 잠이 들었어요. 아주 행복한 밤이었어요. 다시 시간을 되돌린 것만 같았어요. ∷ 어린 시절의 그리운 책 찾기 초등학생 때, 엄마가 전집을 잔뜩 사다놓으셨어요. 놀기 바빠서 안 읽다가 중학교 2 학년 때 처음으로 읽은, <아이들만의 도시>. 그 책이 최근에 가장 생각이 많이 났어요. 눈이 안 보이기 전에 다시 꼭 읽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여러 번의 이사로 그 책을 잃어버렸어요. 책은 잃어버렸지만 내용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점점 시간이 가면서 소중히 간직해뒀던 내용이 흐릿해지더라고요. 그 책이 그리워지고, 간절해졌어요. 얼마나 간절했냐면, 프러포즈로 그 책 하나만 받아도 무조건 응할 것 같았어요. 그 정도로 그 책을 찾고 싶었어요.

눈이 언제 안 보일지도 모르고, 마냥 기다릴 수 없어서 직접 그 책을 찾기로 결심했지만, <아이들만의 도시>라는 책을 찾기가 쉽지 않았어요. 새롭게 나온 개정판이 있었지만…. 낡은 글씨체와 옛 그림체, 그 당시 읽었던 그 책의 촉감을 꼭 느끼고 싶었어요. 꼭 옛날 그 책이어야 했거든요. 이미 절판된 책. 인터넷을 샅샅이 뒤져 중고책을 3 년 만에 찾아냈지만, 전집 중의 한 권이어서 구입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대부분 전집 통째로 판매하고 있었고, 가격도 꽤 비쌌거든요. 끊임없이 판매자들에게 문자를 보낸 끝에 한 사람이 겨우 응해줬어요. 전집 중에 <아이들만의 도시> 한 권만 쏙 빼서 팔겠다고 말이죠. 친구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나보다 더욱 기뻐하며 책을 선물로 사줬어요! 마침, 제 생일이었답니다.


아직 혼자 뛸 수 있어요 마라톤 참가하기 어렸을 때 가장 싫어한 과목이 체육이었어요. 게을러서 운동을 좋아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마라톤이 하고 싶어졌어요.
눈이 안 보이면 마음 놓고 저 혼자 뛸 수 없잖아요. 이왕 하는 마라톤, 게으른 제가 끝까지 다 할 수 있게 달리는 만큼 기부하는 마라톤으로 하고 싶어요. 춥지도 덥지도 않은 상쾌한 날씨에 여러 사람들과 기분 좋게 함께 달리고 싶어요.
나중에는 여러분이 제 손을 잡고 함께 달려주실래요? 진심은 누구에게나 전해지니까요
나의 목소리 녹음하기 “구작가님의 글도 좋고, 그림도 좋아하지만, 무엇보다 구작가님의 목소리가 정말 좋아요.” “어? 왜요?” 정말 의아했어요. 제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는 전 그 말이 너무 신기했거든요. “구작가님의 목소리를 들으면 진심이 느껴져요. 열심히 말하려고 하는 진심이요.”
처음이었어요, 이렇게 말씀해주신 분이.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제 목소리를 저는 듣지 못하지만 녹음을 해서 남겨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진심을 가득 담아서 말이죠. 아직, 이 정도는 혼자서 할 수 있으니까요.
빛이 남아 있는 한 느끼고 싶어요 한국영화 100 편, 책 100 권 읽기 좋은 한국영화가 정말 많아요. 하지만 자막이 없어서 그동안 하나도 볼 수가 없었어요. 저에겐 들리지 않으니 자막이 꼭 필요했거든요. 간혹 ‘청각장애인을 위한 자막 상영’이라는 기회가 있었지만 그날, 정확히 시간이 맞지 않으면 볼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영화가 개봉되자마자 바로 볼 수는 없어도, 한국영화 DVD 에는 자막이 나온대요. 그동안 못 본 영화를 이제 실컷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책은, 스마트폰의 영향으로 잘 안 보게 되더라고요. 종이의 질감을 느끼며 다시 어릴 때처럼 실컷 읽고 싶어졌어요. 아직 제게는 빛이 남아 있으니까요. 아주 작은 빛이지만… 그 빛이 사라지기 전에 종이와 글자의 감각을 마음껏 느끼고 싶어요. 저도 도전할 수 있을까요 볼로냐 동화상에 도전하기
동화작가 최고의 상인 ‘볼로냐 라가치상’. 우리나라에 볼로냐 라가치상을 수상한 사람이 얼마 없대요. 저는, 도전을 하고 싶어졌어요. 제 이야기를 담아서, 제 그림으로 책을 만들어서 볼로냐 전시회에 출품하는 것에 의미를 두고 도전을 할 거예요. 결과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겠지만, 만약에 수상을 하게 된다면 정말 기쁘겠죠? 상상만 해도 너무 즐거워요. 전 세계 사람들과 제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어요. 그리고 함께 사랑과 희망을 느끼고 싶어요. 욕심일까요? 그래도 좋아요!


세상에 꼭 남기고 싶은 게 있어요 나만의 사진앨범 만들기 사진. 사람의 또 다른 눈이 되어주는 사진. 다른 사람이 저를 얼마든지 담아줄 수 있고, 다른 사람이 찍은 좋은 사진을 볼 수도 있지요. 그렇지만 제 시선으로 바라보고 느낀 걸 사진으로 담아낼 수 있는 게 언제까지일지 모르니 사진을 찍는 게 왠지 더욱 간절해졌어요.
그때까지, 제 눈으로 담아낼 수 있을 때까지 맛있는 음식, 예쁜 풍경, 아름다운 곳,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소중한 반려묘 코코…. 각각 주제를 나누고 사진을 많이 찍어서 앨범을 만들어서 고이 간직하고 싶어요. 더 이상 제가 볼 수 없어도 제가 봤던 그 시선은 남겨두고 싶어요. 다른 사람들에게 제가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는 제 시선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요.
이 사진들은 제 눈에 비쳤던 아름다운 세상이에요. 당신의 버킷리스트를 듣고 싶어요 다른 사람과 버킷리스트 이야기하기
아직 빛이 남아 있을 때, 하고 싶은 일들은 모두, 여기까지예요. 눈이 안 보이게 되면 저 혼자 할 수 없는 일들이죠. 누구나 꼭 해보고 싶은 일들이 있을 거예요. 그렇지만 언제든 할 수 있으니까 늘 미뤄놓기만 하죠. 저도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만약 오늘이 나의 마지막 하루라면…. 어떨까요. 별생각 없었던 것들이 모두 큰 의미로 와 닿아요. 요즘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햇살을 볼 수 있는 게 아주 행복한 거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여러분도 꼭 해보고 싶은 버킷리스트가 있나요? 그렇다면 제게 들려주세요. 정말 소중한 오늘 하루, 내 하루만 소중한 게 아니라 여러분의 하루도 정말 소중하니까요. 당신의 버킷리스트를 듣고 싶어요. 신, 규칙이 있어요.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고 당신의 버킷리스트를 고민해보세요.

그럼 진짜 소중한 게 무엇인지… 알게 될 테니까요.






눈을 감아보아요 깊은 바다에서 기차를 타고 칙칙폭폭 언젠가 비포장도로를 달리고 있었어요. 햇빛이 눈부셔 눈을 감아보았어요. 울퉁불퉁한 길 위에 흔들리는 차. 내 몸을 가만히 맡기고 눈을 감아보았어요. 그랬더니 바닷속에서 기차를 타고 달리는 것 같았어요. 물속은 안압을 낮추는 데 좋으니까 아팠던 눈은 편안해질 것 같고, 물속의 감각을 느끼면 기분이 편해질 것만 같아요.
잠시 현실을 벗어나 동화 같은 상상을 해봅니다. 여기에서는 눈도 아프지 않을 것 같아요.
상상하고 싶지 않아요 보이지 않는 상자 이건 어두운 상상이에요. 하고 싶지 않은 상상이에요. 눈이 안 보인다고 인생이 끝나는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살아 있는 느낌이 사라질 것 같더라고요. 사랑하는 사람들과 같이 있어도, 사람들이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조차 모를 것 같아요. ‘옆에 누군가 있다’ 정도만 알 뿐. 그때의 분위기나 표정들. 저만 까맣게 모르고 있을 것 같아요.


같이 있지만, 같이 있는 것 같지 않은, 보이지 않는 ‘유리 상자’. 제게 빛이 완전히 사라지면 그 상자에 혼자 갇혀 있는 느낌일 것 같아요. 이런 상상은 사실, 하고 싶지 않아요. 현실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저에겐
자유로워요 자유 청각장애인에게 가장 괴로운 건 ‘소외감’.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의외로 자유로워질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해봤어요. 표정이 보이지 않으니까 분위기도 알 수 없으니까 신경을 써야 할 일이 많이 없어질 것 같아요. 심심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겁이 없어질 것 같아요. 그래서 자유로워질 것 같기도 해요. 아름다운 것만 상상하고 아름다운 소리만 상상하고 싶어요.


완벽하지 않아도 좋아요 도예 시각과 청각을 잃어도, 아직 생생히 남아 있는 감각 ‘촉각’. 그 감각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봤어요. 손으로 흙을 만지는 거예요. 작품을 훌륭하게 만들지 않아도 되지요. 삐뚤빼뚤해도 좋을 것 같아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멍 때리는 것보다 살아 있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느낀 대로,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대로 재미있는 작품이 만들어질 것 같아요.


손으로 그려요 안 보여도 화가 세상에 시각장애인 화가가 생각보다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들에게는 자기만의 방법이 있는 것 같아요. 어떤 화가는 물감의 온도를 느끼면서 색을 고르고, 또 어떤 화가는 다른 한 손으로 더듬어가며 그리기도 하더라고요. 저는 귀가 안 들리지만 짧은 순간 많은 부분을 스캔하는 능력이 있고, 깊은 관찰을 할 수 있는 능력도 있으니, 눈이 안 보이면 촉각과 후각이 굉장히 예민해질 것만 같아요.

물감의 온도, 그런 걸 섬세하게 느낄 수 있을지 아직은 상상이 안 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눈이 보일 때 수많은 색깔을 보았으니, 그 색들을 모두 기억해서 칠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 손바닥이나 손에 쥐어진 붓으로 감정을 색으로 표현하는 화가가 될 것 같아요. 슬픈 감정도 기쁜 감정도 더 잘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용기를 내어서 말하고 싶어요 안 보여도 강연 입술은 움직일 수 있죠. 먹으라고만 존재하는 게 아니니까요.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입술. 사랑한다는 말을 전할 수 있는 입술. 진심을 전할 수 있는 입술. ‘말’은… 엄청나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듣는 사람들의 표정을 볼 수 없어서 오히려 더욱 긴장이 될 것 같지만, 용기를 내어서 말하고 싶어요. 나의 진심을, 나의 희망을, 나의 용기를요.


손으로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촉각수화 촉각은 생각보다 많은 부분을 차지할 것 같아요. 상대방 손가락의 위치를 점자로 읽듯이 그런 촉각 수화가 생긴다면, 어셔증후군인 사람들에게 촉각 수화는 세상과 단절되지 않고 밖으로 나올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방법이거든요. ✽ 어셔증후군 청각장애와 함께 시각장애가 점차 진행되는 유전학적 질환이에요. 주요 증상은 청각장애와 함께 망막색 소변소증이라 하여 망막이 퇴화됩니다. 그래서 야맹증과 주변 시야를 잘 보지 못하는 장애가 오게 되지 요. 원인은 유전학적이고 이 병의 근본적인 치료법은 아직 없다고 해요. 미국에서는 10 만 명당 4.4 명의 유병률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보이지 않아도 사랑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거예요. 말로 하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예요.
아직 향기가 남아 있어요 꽃에 파묻히다 소리를 잃고 시각을 잃어도 냄새는 맡을 수 있잖아요. 아직 기분 좋은 향기가 남아 있어요. 아직 제겐 많은 감각이 남아 있어요. 그래서 아직 느낄 수 있어요. 달콤한 향, 상큼한 향, 새콤한 향, 상쾌한 향, 여러 향기에 취해 행복하게 사는 것도 참 좋을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앞으로도 계속 행복할 것 같아요.
계속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살아 있으니까요.


끝까지 기다립니다 줄기세포 이식 지금부터 10 년 후에 어셔증후군 환자를 위한 줄기세포 이식수술이 나올 가능성이 있대요. 그 수술을 받으면, 시각뿐만 아니라 귀의 감각도 다 돌아온대요! 얼마나 놀라운 일일까요! 그날을 ‘희망’으로 부르고, 품고 기다릴 거예요. 그날이 올 때까지 절대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그때까지 전, 할 일이 너무 많거든요.

빛도 소리도 다시 돌아올 수 있다면… 언제까지든 기다릴 수 있어요.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요 버킷리스트는 사실 30 가지
30 가지 버킷리스트 중 25 가지를 눈이 보이는 동안에 얼른 해보고 싶은 마음으로 썼어요. 왜 30 가지를 전부 안 썼냐고요? 금방 30 가지를 모두 채우면, 달성했다는 기쁨보다 허무한 느낌이 클 것 같아서요. 이제 할 일이 없어진 것 같은 그 허무한 느낌. 그래서 나머지 다섯 가지를 일부러 비워두었어요. 두고두고 아껴두었다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넣으려고 해요. 하루하루 가는 게 너무 소중한 만큼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남겨두려고 해요. 당신에게도 꼭 하고 싶은 소중한 리스트가 있나요? 그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지금 당장 여기에 적어보세요. 오늘 하루가 너무 소중하니까요.













그래도 괜찮은 하 루 종이책 발행 2015 년 02 월 17 일 전자책 발행 2015 년 02 월 25 일 지은이 구경선 펴낸이 연준혁 출판 6 분사 분사장 이진영 편집장 정낙정 편집 박지수 최아영 디자인 하은혜 전자책 PM 전효원 dicon@wisdomhouse.co.kr 전자책 제작 (주)위즈덤하우스 멀티콘텐츠 사업분사 펴낸곳 (주)위즈덤하우스|출판등록 2000 년 5 월 23 일 제 13-1071 호 주소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장항동 846 번지 센트럴프라자 6 층 전화 031-936-4000|팩스 031-903-3895 홈페이지 www.wisdomhouse.co.kr © 구경선, 2015 전자책 ISBN 978-895913-895-1 * 이 전자책은 IDPF 국제표준규격을 준수하여 제작되었습니다. * 이 책의 전부 또는 일부 내용을 재사용하려면 사전에 저작권자와 (주)위즈덤하우스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